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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의 성격, 고구려의 초기와 미천왕 (The Nature of the Ancient State: Early Goguryeo and King Micheon)

큰별쌤 한국사 이야기 (2013년 강의를 메모한 내용) 리마스터링 입니다. 물론 리마스터링 이라고 해서 완벽한 명품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저의 잘못 입니다. 제 4편 이야기 곧바로 시작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삼국시대의 막이 오릅니다. 낯선 왕들의 이름과 복잡한 제도들이 쏟아지면서, 많은 이들이 한국사를 거대한 '벽'으로 느끼는 첫 번째 고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삼국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힌트, 바로 '고대 국가의 성격'을 먼저 머릿속에 장전해 둔다면 이 역사의 지도는 의외로 쉽게 읽힙니다. 연맹 왕국을 넘어 고대 국가로 진입할 때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바로 왕권의 강력한 집중, 즉 1인 지배 체제의 완성입니다. 느슨한 자치와 각자의 신념으로 움직이던 연맹 왕국과 달리, 고대 국가는 위에서부터 율령(법)과 종교, 질서를 칼날처럼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중앙 집권 체제입니다. 자, 이제부터 이 거대한 권력의 이동을 조금 재밌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Now, the curtain officially rises on the Three Kingdoms period. As a torrent of unfamiliar royal names and complex institutional systems floods in, this era often marks the first major hurdle where many begin to perceive Korean history as an impassable wall. Yet, if we first equip our minds with the master key—the defining characteristics of an ancient state—this historical map unfolds with surprising clarity. The most decisive mutation when transitioning from a loose tribal confeder...

옥합이 깨어질 때 (When the Alabaster Jar Breaks) - 홍종일목사

옥합이 깨어질 때 설교 - 홍종일 목사님 창신교회 사역하실 때의 설교원고 (2004년 1월) 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도유사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도유, 기름을 바르다라는 말이겠는데 이 사건은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Today, we reflect upon the anointing of Jesus—a profound moment captured across all four Gospels.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같은 사건은 아니고 이 누가복음만을 제외하고 마태, 마가, 요한에 나온것은 같은 사건으로 예수님의 일생에 두 번의 도유사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내용인것입니다.

Yet, a closer examination reveals that these accounts do not depict a single occurrence. Aside from the Gospel of Luke, the narratives in Matthew, Mark, and John point to a separate event. In truth, two distinct anointings graced the earthly life of Jesus, each carrying entirely different historical and spiritual weight.

1. 바리새인의 식사초대

1. An Invitation from a Pharisee

가버나움의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글쎄 지금 우리네 생각으로는 중직자가 단순히 교역자를 식사에 초대하는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이는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In Capernaum, a Pharisee named Simon invited Jesus to dine with him. In our modern context, we might casually view this as a church leader hosting a visiting minister. In the days of Jesus, however, such an invitation was nothing short of extraordinary.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행, 즉 죄인과 세리를 친구로 두시고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며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독사의 자식들로 정죄하며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통렬히 비판하는 그러한 모습은 종래의 기득권자들이 생각할 때는 거의 혁명가 수준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일원으로서 주님에게 식사초대를 한다는건 굉장한 일인 것입니다.

Jesus was a radical nonconformist, a spiritual revolutionary in the eyes of the establishment. He befriended sinners and tax collectors, openly violated the rigid sabbath traditions, and fiercely denounced the hypocrisy of the ruling priests and scribes as a "brood of vipers." For a member of the elite Pharisaic order to invite such a disruptive figure to his table was an immense anomaly.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한 바리새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히브리원문의 의미는 많은 바리새인이 있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정도의 뜻으로 많은 바리새인이 주님을 배척하는 마당에 한명이 이례적으로 주님을 식사에 초대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시몬이 왜 주님을 초대했는지는 모릅니다. 여하튼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위하여 앉으셨습니다.

The original Hebrew nuance of the text implies that among the vast, hostile majority of Pharisees who rejected Jesus, this one individual stepped forward as a rare exception. Though his true motives remain veiled in history, Jesus accepted the gesture, entered the Pharisee’s house, and reclined at the table.

2. 여자의 등장

2. The Intrusion of the Woman

그런데 그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담은 옥합을 들고 와서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당시의 광경을 조금 더 생생하게 한번 그려봅시다.

It was then that an uninvited guest shattered the decorum of the banquet. A woman, known in the town as a sinner, entered bearing an alabaster jar of expensive fragrant oil. She stood behind Jesus at His feet, weeping. Her tears rained upon His feet, which she then wiped with her uncovered hair, kissing them repeatedly before pouring the precious oil upon them. Let us recreate this scene with cognitive vividness.

예수님이 손님의 자리에 누워서, 아니 기대어서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비스듬히 옆으로 누우신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예수님은 평상이나 카페트위에 누우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적어도 거적대기 위는 아니겠지요.

Imagine Jesus reclining on a couch or a raised carpet—certainly not a mere straw mat—leaning on His left elbow as was the custom of a formal banquet.

그리고는 식사를 하시는데 난데없이 한 여자가 발곁에 서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걸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어버렸다 이 말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인데 이렇게 비싼 향유로 발에 부어버리는것인지.

As He dines, a woman suddenly appears at His feet. She does not merely shed a few tears; she drenches His feet with a downpour of sorrow, unbinds her hair to dry them, and empties a vessel of costly perfume. The shock in the room must have been palpable.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여인은 마을의 유명한 창녀였기 때문입니다. 37절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당시 유대인들은 여자에게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일땐 창녀를 의미했습니다. 창녀가 자기의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걸 닦아내고 그리고 향유를 붓고. 참 굉장히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조금은 이상하기도 하고....

For this was no ordinary woman; she was the town’s notorious prostitute. In first-century Jewish society, labeling a woman a "sinner" was a distinct euphemism for a courtesan. The Saint and the Sinner. It is a jarring, uncomfortable juxtaposition. The imagery feels fundamentally mismatched.

더구나 사랑하는 연인사이도 아니고 창녀가 성자 예수님에게... 이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창녀와 성자, 좀 그림이 낯설고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집주인 시몬은 속으로 예수님이 과연 선지자였다면 이 여자가 창녀이고 그러면 자기를 감히 만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을 약간 우습게 여기기 시작을 합니다.

Observing this, Simon the host began to look down on Jesus, reasoning internally: “If this man were truly a prophet, he would know what kind of woman is touching him—that she is a sinner—and he would never allow it.”

3. 성서적 내러티브의 해체

3. Deconstructing the Act of Devotion

(1) 눈물로 발을 씻었다

(1) Washing His Feet with Tears

우선 여인은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실컷 울어보셨습니까? 그런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많이 울었다해도 눈물로 발을 씻는다는게 가능합니까?

The text states she stood at His feet, weeping until they were wet. Have you ever wept so intensely that your tears could wash another person's feet?

우리는 이런 기억이 있습니다. 흙장난을 한손을 씻어야 되는데 물이 별로 없어서 물만 축이게 되면 먼지가 젖어서 오히려 더 더럽게 됩니다. 그런고로 더러운 흙손을 제대로 씻으려하면 어느정도의 물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한바가지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을까. 더구나 손보다 더 큰 발이라고 생각한다면 물이 얼마나 들게 될까요. 그런데 아무리 많이 울어도 그렇지 세상에 눈물로 발을 씻는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Consider the sheer volume required. If you try to wash hands soiled with dust using only a few drops of moisture, the dust merely turns to mud, making them filthier. To truly cleanse a pair of feet, it requires a substantial amount of water—at least a pitcher's worth. How, then, could human tears suffice?

그런데 이 속에 조금 색다른 풍습이 하나 생각납니다. 무언고 하니 눈물병이라는 겁니다. 당시 로마나 유대나 모두 이 눈물병 이라는게 있었습니다. 사람들마다 이 눈물병을 만들어서 슬프거나 한 일이 있으면 모두 이 눈물병에 자기의 눈물을 받아둡니다. 역사상 네로의 눈물병은 정말 유명합니다. 심지어 초상집에 갈때나 울러 가게될때는 이 눈물병을 가지고 갑니다.

Here, a unique ancient custom illuminates the text: The Lacrimatory, or the Tear Bottle. In the ancient Roman and Jewish worlds, people kept small vessels crafted from glass or earthenware specifically to collect their tears during times of deep sorrow or bereavement. Nero’s historical tear bottle remains famous to this day.

이 눈물병은 유리처럼 귀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질그릇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모든 대소인민들이 하나씩 가지고 자기의 일생동안의 눈물을 이 병에 담아 자기가 죽을때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여인의 경우에는 자기의 눈물병을 첫날밤 신랑에게 보여주는 그런 풍습도 있었습니다. 나의 슬픔이 이정도였다, 내가 당신을 만나기위해 이렇게 오래도록 기다렸다 뭐 그런 의미겠지요.

These bottles were profoundly intimate; individuals would accumulate their life’s sorrows within them, and the bottle would ultimately be buried alongside them in their tomb. For a woman, her tear bottle was often presented to her groom on their wedding night—a silent testimony saying, "This is the depth of the sorrow I endured while waiting for you."

그런데 만일 이 눈물병을 깨어버리거나 쏟아버린다면 이는 엄청난 수치요 모욕입니다. 더구나 여인에게 첫날밤 신랑에게 보여줄 눈물병이 없다니.......... 그러므로 모든 이들은 이 눈물병을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바로 이 눈물병에 든 이 여인의 지금까지의 한평생의 눈물을 쏟아서 이 여인은 주님의 발을 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너무나 귀하고 엄청난 희생입니다. 우리는 돈에 관심이 많아서 눈물은 별로로 생각하고 향유만 귀하게 여깁니다. 향유가 귀하기는 하지만 이 여인에게 눈물병의 눈물만큼 귀하지는 않다 이말입니다.

To shatter or spill another's tear bottle was an act of supreme humiliation. Conversely, to empty one's own bottle was a total surrender of one's past. The woman at the banquet did not merely cry on the spot; she brought the vessel of her lifelong grief and poured out her accumulated tears to wash the Savior's feet. It was an irreplaceable sacrifice. We, driven by material calculations, often marvel only at the expensive oil. Yet, to this woman, the tears of her tragic lifetime were far more precious than any perfume.

(2) 다음은 머리털입니다

(2) The Unbound Hair

여인네에게 아름다운 머리털은 미의 근원이자 자랑입니다. 길고 부드러우며 윤기가 나는 머리털을 만들기 위해 많은 여인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길수록 검을수록 부드러울수록 윤이 날수록 여인의 아름다움은 더해가는 걸로 여겼고 아무데서나 여인의 머리를 푸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즉 자기의 사랑하는 이만을 위하여 머리를 간수하고 그의 눈앞에서만 머리를 푸는거죠.

For a woman of that era, long, lustrous hair was the ultimate crown of beauty and pride. Women spared no effort to cultivate its texture and shine. It was strictly understood that a woman’s hair was preserved exclusively for the gaze of her beloved; unraveling it in public was considered a scandalous, deeply shameful act.

그런데 이 머리털로 여인은 주님의발을 씻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표현대로 하면 깨끗하게 닦았답니다. 눈물로 씻은 발을 머리털로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남자의 더러운 발을 여인네의 머리털로 씻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 여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는 수군수군하고 비웃고 욕하고 혀를 차고 여하튼 조소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입니다.

Yet, she used this very crown as a towel. The original text emphasizes that she wiped His feet meticulously clean. To wipe the dusty, dirty feet of a man with her own hair in a room filled with judging eyes was an act of absolute self-abnegation. The guests undoubtedly sneered, whispered, and mocked her.

여러분, 창녀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고 또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철면피는 아닙니다. 그런 여인라면 당연히 울지도 않을 것이며 아름답지 않다면 창녀를 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는 가운데서도 무릎을 꿇고는 예수님의 발을 정성스레 자기의 머리털로 닦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대충하고 만 것이 아니라 정말로 꼼꼼하게 닦아나가는 여인의 모습, 그러고 난 다음의 이 여인의 모습은 정말 볼만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긴 머리털이 완전히 억새처럼 변하고 짚단처럼 들쑥날쑥이어서 보기에 너무나 추해 보였을 것입니다.

A courtesan is not devoid of shame or immune to ridicule; had she been a cold-hearted cynic, she would not have wept in the first place. Imagine her kneeling amidst the cruel derision of the crowd, carefully and thoroughly drying His feet. When she finished, her beautiful, carefully kept hair must have looked ruined—matted, disheveled, and stained with the grime of the road.

(3) 향유와 돈의 가치

(3) The Valuation of the Fragrant Oil

마지막으로 이 여인은 물기를 닦아낸 발에다 향유를 붓습니다. 사람에게는 역시 돈이 중요하니까 돈으로 한번 따져봅시다. 우리는 이 향유가 도대체 어느정도의 가치를 가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향유를 담은 옥합이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쏟아부은 향유를 담은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와 비슷하거나 같은 종류의 향유가 아니었을 까요?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부은 향유는 삼백데나리온에 달하는 고가품이었다고 합니다.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 물론 병만 같고 내용물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헌데 이 향유는 사용하기 위해서는 옥합을 깨뜨리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옥합은 자체로도 아주 귀한 것이며 고가품에 속합니다.

Finally, she pours the fragrant oil. Let us look at the economic reality. While we cannot pinpoint the exact valuation of this specific jar, the text indicates it was identical in form to the one Mary of Bethany later poured over Jesus' head. Mary’s ointment was valued at three hundred denarii—an entire year’s wages for a common laborer. To utilize this fragrance, the alabaster jar had to be broken. These vessels were costly pieces of craftsmanship, sealed tightly at the neck to prevent the precious volatile scent from evaporating.

(4) 먼저 옥합을 깨뜨려라

(4) Breaking the Alabaster Jar

그런데 그 옥합은 냄새가 날아 갈까보아 주둥이가 봉인되어있기 때문에 그 향유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병을 깰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에게 향유만을 붓기 때문에 옥합이 아니라 향유만 필요하지만 그래서 옥합은 안깨뜨리고 온전하게 보관했다가 다시금 다른 향유를 채웠으면 좋겠는데 향유를 사용하기위해서는 어쩔수없이 옥합을 깨뜨려야 한다는 겁니다. 안타깝습니다. 우리도 종종 이런일을 경험합니다. 여하튼 우리가 주님께 귀한것을 드리려 할 때는 그 드림을 위해서 또 다른 것을 더 드려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이게 아까워서 드리지 못한다면 그는 영영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리지 못하게 되고 " 죄사함을 받았다" "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말씀도 들을수 없는 것이지요.

To extract the liquid, the neck of the jar had to be sheared off. Once broken, it could never be resealed or reused. It was an all-or-nothing offering. The entire content had to be expended at that very moment. Sometimes when we wish to offer something precious to the Lord, we must sacrifice yet another thing to make that offering possible. If we withhold it out of regret, we can never pour out the oil or hear the blessing: "Your sins are forgiven. Go in peace."

여하튼 본문의 이 향유를 담은 옥합은 주둥이 부분이 봉인이 되어있어서 안에든 향유를 꺼내기 위해서는 주둥이부분을 베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주둥이가 깨어지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옥합보다 엄청나게 비싼 기름이 아니고는 옥합을 깨면서까지 내용물을 사용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이 향유는 일단 한번 사용하면 남겨두었다가 다시 사용하지 못하고 한번에 다 사용해야 합니다. 옥합도 깨어졌고 다시 다른 옥합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아무리 정성스럽게 보관한다 하더라도 향기가 다 날아가서 쓸모가 없어지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소중한 사람이 아니고는 부을 수가 없습니다.

The neck of the jar was sealed to preserve the fragrance, so it had to be broken to be used. Once broken, it was finished. One would not break a precious jar unless the oil inside was immensely more valuable. Furthermore, it could not be saved for later; it had to be poured all at once. Therefore, it could only be bestowed upon someone of absolute significance.

일반적으로 유대의 여자들은 첫날밤의 신랑을 위해서 이러한 향유를 준비하기도 하고 부자나 귀인들은 장사를 지내기 위해 이러한 향유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보통의 여인네가 이러한 것을 가지려면 일생에 한 번, 즉 혼례일이 아니고는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인은 몸은 비록 창녀를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정말 자기를 이러한 죄악된 삶에서 구해서 행복하게 해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며 눈물병과 옥합을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날을 위해 그 비싸고 귀한 것들을 간직해 왔는지 모릅니다.

Typically, Jewish women prepared these jars for their future husbands, or the wealthy reserved them for burials. For a common woman, it was a once-in-a-lifetime luxury, meant solely for her wedding day. Perhaps this woman, despite her compromised life as a courtesan, had kept this tear bottle and alabaster jar hidden away, clinging to a fragile dream that one day a true love would rescue her from the shadows.

그런데 그 여인은 이제 그것을 자기의 신랑이 아닌 주님에게 그것도 머리가 아니고 발에 쏟아붓는 것입니다. 감히 머리에 붓지 못하고 발에다가... 참 이 여인은 가련하기도 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주님의 발에 쏟아부어야만 하다니... 저는 이 여인이 일생을 독신으로 주님을 따를 마음으로 이러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바로 다음장에 보면 여자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겼다고 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 여인은 자기가 시집갈 때 신랑에게 줄 귀한 것들로 주님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도 모자라 주님의 발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과 입으로 맞추는 예를 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정성들여 닦은 발에다가 끊임없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 말입니다.

Yet, she surrendered that final earthly hope. She poured it not upon His head, but upon His feet—deeming herself unworthy to touch His brow. It was a beautiful, tragic total surrender. I believe that at that moment, she chose a life of singular devotion to the Lord, casting away all secular expectations of a traditional marriage. She continually kissed His feet, performing an act of deep reverence.

시몬은 그 여인이 죄인이고 죄인된 여인과 접촉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 주님을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에 아랑곳 않으시고 여인에게 아페온타이 네 죄가 사하여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시고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그래요 우리 믿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을 축복이 바로 평안히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속으로 들어가는것 바로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궁극적인 축복입니다.

While Simon judged her from the heights of his self-righteousness, Jesus looked at her heart. He declared, “Aphēontai—your sins are forgiven.” He noted that her extravagant act was a reflection of her great love. Turning to her, He offered the ultimate benediction: “Go in peace; your faith has saved you.” To step into the divine tranquility offered by God is the ultimate blessing for those who love Him.

창피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주님께 나아와서 내가 고이 간직한 내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께 드린 여인. 비록 귀한 향유라서 머리에 부어도 충분하건만 차마 머리에 붓지 못하고 발에다 부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인. 그래도 부족해서 연신 주님의 발에 입맞추고 있는 이 여인. 일생동안 흘린 눈물병을 깨어서 주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자랑인 머리털로 그 발을 닦고 옥합을 깨어 향유를 쏟아부은 이 여인. 그가 비록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이미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깨끗한 몸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몸이다. 그러므로 이제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여인은 일생동안 주님을 따를것입니다. 더 이상 이 여인에게는 세속적인 귀중한 것들도 없고 소망도 끊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This woman braved public scorn, shame, and vulnerability to offer her absolute best. She broke her lifetime of tears, ruined her crowning glory, and shattered her financial security at His feet. In return, the Savior declared her clean, restored, and beloved. From that moment on, she would follow the Lord, for her worldly attachments and secular desires had been completely eclipsed.

오늘 우리는 이 여인처럼 우리의 눈물을 주님에게 내어놓기를 원합니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겨 고이간직했던 향유를 쏟아붓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옥합을 깨뜨리기를 원합니다. 옥합이 깨어질때만이 비로소 향유가 향기를 낼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자랑하는 치렁치렁한 머리로 주님의 발을 씻습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오히려 나는 죄에서 자유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마침내 평안속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Today, we are called to bring our own tear bottles before Him. We must be willing to pour out the fragrant oil we have so jealously guarded. To do that, we must first break our alabaster jars. Only when the jar is shattered can the fragrance truly fill the world. I wipe His feet with my long hair, my pride. Now, nothing remains of my former self. Yet, because of this, I am liberated from sin and drawn closer to the Lord, entering the divine tranquility of God. May you all step into that very peace.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Epilogue: Notes from the Archivist (By Seabook)

  1. 우리는 참 가진 것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욱 가지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소중한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또한 소중한 것을 절대 깨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의 변화는 소중한 그 무엇을 부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무엇인가를 버려야 한다. 가득 찬 컵에는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

  1. We possess so much, yet we constantly claw for more. We fail to cherish what is truly sacred, and we fiercely resist breaking our precious containers. Yet, true transformation only begins when we willingly shatter that which we hold most dear. To attain something higher, something else must be abandoned. A cup that is already full can hold nothing new.

  1. 신앙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깨뜨리고 비우고, 하나님의 것을 채우고 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옥합을 깨뜨려야 한다. 내려놓음이 있어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에 목소리를 높이던 진보주의자 보다,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위하는 크리스천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아직 청년이라 그런지 진보주의가 훨씬 더 마음에 든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위하는 진보주의자가 될 것이다. 혹자는 비웃을 지도 모른다. 그런 나약하고 안일한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다고. 그렇다 현실이란 냉혹한 법이니 그 말도 사실일 것이다.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고 절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길을 찾아서 싸울 것이다.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고 싸울 것이다.

  1. What is faith? It is the process of breaking and emptying oneself to be filled with the things of God. It requires a conscious letting go—a holy relinquishment. In his youth, Fyodor Dostoevsky noted that he was far less moved by loud, political progressives than by the quiet, humble Christians who bowed their heads to serve others. Being young, I still find myself drawn to the fire of progressivism. However, I resolve to be a progressive who fights with a bowed head and a humble heart. Cynics might sneer, claiming that such a gentle disposition cannot alter the cold, brutal machinery of reality. Perhaps they are right. There are days when the weight of this world induces despair. Yet, I will find my own path and fight. I will fight without ever losing my humility.

  1. 크리스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창녀를 비난하지 않았음을. 그는 죄인에게 결코 돌을 던지지 않았음을. 보잘 것 없어보이는 사람이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기독교의 그 세계관이 나는 참으로 좋다.

  1. To be a Christian is to follow the footsteps of Christ and mirror His character. We must remember: He did not cast a stone at the courtesan. He never condemned the broken sinner. He looked at the marginalized and deemed each one of them infinitely precious. It is this specific, radical worldview of Christianity that I deeply love.

  1. 당신이 누구라도 좋다. 죄인이든 부족하든 못났든 힘들든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이다. 당신의 중요한 것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행동하심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비전을 좇는 삶이다. 꿈을 좇는 삶이다. 운전대를 그 분에게 맡긴다는 것의 의미는, 신나고 흥미로운 전혀 알지 못했던 길로 들어서는 놀라운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세상을 바라보지 마라. 할 수 있다고 믿어라, 새롭게 일어설 수 있음을 믿어라.

  1. It matters little who you are—whether you are burdened by sin, feeling inadequate, or utterly exhausted by life. None of that is the ultimate metric. What matters is your willingness to break your alabaster jar. Step out of your self-imposed boundaries and trust. When you hand the steering wheel over to Him, life ceases to be a predictable routine; it transforms into an exhilarating, unpredictable journey into uncharted territories. Stop viewing the cosmos through the narrow slit of your own limitations. Believe that you can rise again.

  1. 분명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뿐인 이 인생의 주인공인 당신이 삶을 나아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by 시북 (여기까지가 2008년 1월의 글)

  1. You are the sovereign protagonist of this singular life. Step forward into the arena; you possess the capacity to change the world. (Written in January 2008 by Seabook)

  1. 생각해 본다. 2010년이 되었다. 3월이 되었다. 그렇다, 어쩌면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유독 예수님을 좇는 삶에 있어서, 버릴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동안은 도무지 버리지 못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인기, 명예로움, 즐거움, 이런 것들은 대게 한 순간이다. 게다가 이런 것들을 좇음으로써 인생이 더 행복하다 할 수 있는가... 내가 좇아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어야 한다. 소중한 관계, 그리고 사람이다. (2010. 03.)

  1. Two years have passed, and it is now March 2010. Once again, I find myself standing at a significant crossroads. I find myself reflecting deeply on what must be discarded if one is to truly follow the path of Christ. For a long time, there were things I simply could not bring myself to let go. But now, I feel a strange readiness to relinquish them all. Popularity, reputation, fleeting pleasures—they vanish like mist. Does chasing them truly yield human happiness? The anchor of my existence must not be financial capital. It must be sacred relationships, and the human soul. (March 2010)

  1. 2년이 더 흘렀다 2012년이 되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따뜻한 4월이다. 포도막염 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다녀왔다. 약을 넣고 무리하지만 않으면 별 탈이 없을 것이라는 말에 큰 안심이 되었다. 옥합이 깨어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도 한 번씩 생각해 본다. 내 생각이나, 내 가치관이 깨어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정확한 삶의 의미와 기준을 바로 잡고 신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신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무엇일까 한 마디로 정의내리긴 여전히 어렵지만, 한 마디로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곤 한다. (2012년)

  1. Two more years have flown by, bringing me to a warm, blossom-scented April in 2012. I recently visited the clinic due to sudden symptoms of uveitis. To my immense relief, the physician assured me that with proper medication and sufficient rest, I would recover completely. Sitting in the quiet aftermath of that health scare, the metaphor of the broken alabaster jar visits me once more. I realize now that the jar represents my own rigid ego and dogmatic values. To break it means to shatter my self-centered paradigms. The joy of faith lies precisely in anchoring our standards upon a higher, divine matrix, allowing us to live with boundless freedom. While it remains difficult to crystallize "living by divine values" into a single definition, today it distills beautifully into a single concept: The act of giving. (2012)

글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옛 블로그에서도 아주 초기에 작성된 글입니다. (2008년이니까요.)

2026년의 영감을 짧게만 써봅니다.

눈물병이 이제 저도 모였나 봅니다.

가족 중 한 분을 떠나보냈고, 수술도 해봤고, 건강이 흔들거립니다.

오늘도 설교 한 편은 영문버전 만들어야지 했다가, 육신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 졸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건강이 쇠약해져 가고, 지켜보는 것은 또 흐르는 눈물이 됩니다.


예수님은 짧게만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너를 인도하고 있단다."

저는 당황합니다. "네?"

사는 건 슬픔이 더 가까운데도, 날이 갈수록 - 어떻게 삶을 사는게 좋을지 - 알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청년 시절의 제가 훨씬 더 명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했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찬송가 멜로디가 생각 납니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그것이 인생의 약함이나 기댐이 아니라, 인생의 큰 축복이자 지혜로 들리다니.

세월이란, 가끔은 좋을 때가 있습니다.


- 2026. 06. 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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